2년만에 들른 홍대의 네온사인이 번쩍거렸습니다. 모두가 내 전역을 축복해주는 것 같았습니다. 하늘 끝자락이 밝아오기 시작할 때까지 술을 마시고, 동기들과 언제일 지 모르는 다음 모임을 기약하며 비틀비틀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고는 노트북을 꺼내 술이 덜 깨어 핏발 선 눈으로 나가기 전 끝내지 못한 과제를 마저 했습니다. 생각해보면 나에게 2020년이 시작된 것은 그때였던 것 같습니다.
부대에는 사람이 먹고 사는데 필요한 모든 것이 존재하지만, 내가 원하는 일을 할 수 있는 선택권만은 없었습니다. 해가 지고 별이 뜬 새벽에는, 입을 꾹 다문채로 하늘을 보며 내 꿈, 내 욕망, 내 열정을 마음의 손으로 쓸어내렸습니다. 그러면 터져나올 것 같던 붉은 불꽃들이, 차분한 푸른 불씨가 되어 가슴 깊은 곳에 꼭꼭 눌러 담겼습니다. 전역 날 불씨를 당길 생각을 하며, 나 스스로에 대해서 생각하고 또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당장에라도 잠들고 싶은 생각을 떨치고 노트북을 꺼낸 그 순간, 오랫동안 눌러 둔 불씨가 타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아 닥치는대로 해보기로 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잘 때까지 머릿속에는 어제의 나보다 더 뛰어난 내가 되고싶다는 승부욕이 넘실거렸습니다. 몇몇 밤은 코드와 씨름하며 지새우고, 몇몇 밤은 제품의 방향에 대해 고민했습니다. 동이 트면 잠자리로 기어들어갔습니다. 내가 '인생에 몇 번 없는 흐름을 탔다'고 생각했고, 하나의 기회가 또 다른 기회로 이어지는 것을 보면서 내 성공을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남들과 다르게 사는 것이 곧 특별해 질 수 있는 길이라고 믿었기에, 마음이 가는대로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야만 후회하지 않을거라고 생각했습니다.
2020년이 저물어가는 시점에서 보자면, 그건 제 착각이었습니다. 나는 후회 없는 삶을 살 거라고 주변 사람들에게 소리치고 다녔지만, 올해에 후회한 순간은 많았습니다. 좀 더 기다렸더라면 그 동아리에 들어갈 수 있었을 텐데, 좀 더 깊이 생각했다면 섣불리 휴학하지 않았을텐데, 좀 더 신중했더라면 그 사람을 너무 믿지 않았을텐데. 수없이 많은 '그 때 그랬더라면'의 연속이었습니다. 좋은 직장에 취직을 한 동기, 멋진 프로젝트로 성과물을 낸 지인, 착실하게 사업을 이끌어나가고 있는 이들... 시간이 지날수록 그들은 더 커 보였고, 저는 점점 더 초라해보였습니다.
하루는 누군가가 나에게 '참 열심히 산다'고 말했습니다. 또 누구는 나에게 '포텐셜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 말에 기가 살아 '그래, 나는 기회만 있으면 크게 뛰어오를 수 있어. 나는 지금 운이 좋지 않은 거야'라고 생각했습니다. 얼마 후에는 정작 주어진 기회에서 내 능력이 보잘것 없어 기회를 잡지 못했습니다. 방 구석에 틀어박혀 내 상황과 능력을 탓했습니다. 그걸 반복하며 자존심은 몇 차례나 솟고 또 구겨졌습니다.
오늘 또 큰 기회를 하나 놓치고 나서, 나는 깨달았습니다. 후회는 피할수가 없습니다. 내 가슴이 이끄는대로 선택해도, 결과가 마땅찮으면 후회하곤 했습니다. 지원했던 인턴에 떨어졌을 때, 사정사정하여 얻은 일을 드랍했을 때, 열정으로 시작한 사업에서 도망쳤을 때... 후회하느냐 하지않느냐는 결국 결과의 문제입니다. 충분히 단단하지 못한 나에게는 그렇습니다. 또 남들과 다르다는 것이 성공을 보장하지도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남들과 '다른 것'이 아니라 '다른 이유'입니다. 뚜렷한 주관과 충분한 고민이 없이 다른 길을 택할 바에는, 모두가 가는 길을 택하는 편이 낫습니다. 그 편이 내 모호함을 덮어주니까요.
다만 그 실패를 곱씹으며 침대에 누워만 있지는 않아야겠습니다. 시도가 많았기에 실패도 많았으니까요. 돌이켜 생각해보면, 내가 부대에서 꿈꿨던 것은 성공이 아니라 시도할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씁쓸한 입맛을 다시며, 혼자 공부를 하고 프로젝트를 하고 또 지원서도 여럿 내야겠지요. 그리고 그 경험이 언젠가는 나를 '포텐셜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 '지금 충분히 매력적인 사람'으로 만들어 줄 것이라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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