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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paca

모래시계

by 욕심많은알파카 2020. 8. 28.

  내가 삶의 기록을 남기고자 블로그를 시작 한 뒤 벌써 반년이 훌쩍 넘는 시간이 지났다.

한동안 글을 쓰지 않은 것에 바빴다는 핑계를 댈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굳이 글로 적지 않을지라도 의미있는 삶의 나이테가 차곡차곡 쌓였기 때문이었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흐르지만, 시간의 밀도는 모두가 다르다. 굵직 굵직한 행복, 또는 고통의 기억들이 그 시간의 밀도를 결정한다. '무거운' 시간은 삶에 더 큰 흔적을 남긴다. 나에게는 피로그래밍에 매달렸던 올해 겨울부터 여름이 그랬다. 내 삶의 방향을 바꾸어놓았다고 생각한다. 특히 이 동아리는 정말 신기해서, 모두가 나와 같이 '무거운' 시간을 보냈다는 것이 특별했다. 마치 그 순간, 그 공간에 아주 커다란 중력이 작용한 것 같았다.

 

  살다보면 문득 '지금 보내는 이 시간을 언젠가 그리워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 있다. 내 경험상 이런 순간은 정말 행복한 순간이다. 너무 행복해서 두려워진다는 말을 이제는 이해할 수 있다. 얼마 있지 않아 지금의 행복이 끝나고, 앞으로 다시는 이와 같은 순간을 누릴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피로그래밍을 시작하고 매 순간 그랬던 것 같다. 아주 즐거운 꿈을 꾼 느낌이다. 좋은 사람들과 나의 땀, 고민, 노력, 밤을샜던 순간, 마음을 졸였던 기억... 모든 것이 참 과분하고 좋았다. 계속 머무르고 싶었다.

 

  내 코가 석자라고, (그것이 실력이든 커리어든) 철저히 나의 발전을 위해서 내 남은 대학생활을 쏟아붓겠다던 전역 시의 다짐과 달리, 결국은 반년도 되지 않아 회장을 맡았다. 내가 남들보다 뛰어나거나 더 똑똑하지 않다는 것은 이미 충분히 알고있었기 때문에, 남들보다 더 많은 시간을 쏟고 성실하려 노력했다. 거기에 더해 어수룩한 나를 다그쳐주고 함께 기수를 이끌어 나갔던 고마운 부회장과 운영진들이 있었기 때문에 큰 탈 없이 활동을 마무리 할 수 있었다.

 

  마지막 날에 운영진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앞으로는 우리가 이렇게 만날 수 있는 날이 많지 않을 것 같다고, 느낌이 그렇다고 말했다. 마치 모래시계 모양처럼, 흩어져서 각자의 길을 달리던 우리가, 피로그래밍이라는 좋은 동아리에 이끌려 한 점에 모이고, 지금은 이제 다시 각자의 길로 흩어지고 있는 중이라고. 누군가는 새로운 동아리로, 누군가는 새 직장으로, 누군가는 새로운 공부로, 모두 각자의 길로 흩어졌다. 한 손으로 손가락을 모았다가 퍼뜨려 모래시계 모양을 만들면서, 속으로 울컥하는 것을 삼켰다.

 

  그래서, 이제는 깰 때가 된 것 같다. 남들보다 조금 더 긴 꿈을 꿨다. 나도 나의 새로운 길을 찾아가야지. 물론 피로그래밍에서 얻은 많은 것들이 나를 여기까지 밀고 왔지만, 내 삶의 변곡점이 여기만은 아닐테니까. 갈림길은 어디에나 있고, 사람의 성장은 시간과 정비례하지 않는다. 앞으로의 새로운 선택이, 피로그래밍에서의 경험처럼 내 삶을 크게 뒤흔들기를.

 

  마지막으로 아주 어릴적부터 좋아했던 판타지 소설의 대사를 적어두고자 한다. 이 소설은 참 신기하게도, 나이가 들어 유치하다고 느낄 때 쯤 다시 읽어보면, 이전에 느끼지 못했던 부분에서 새로운 감동이 느껴진다. 그러고 보니 이 작가의 사인회도 꼭 가볼거라고 다짐했는데, 잊고있었다.

"삶에서 가장 좋은 순간은 언제나 덧없어. 너무도 빨리 가버려. 여름 오후의 좋은 빛을 잡아둘 수 없는 것과 같지. 이제 또다시 그런 때가 온 것 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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