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좋은 책들을 충분히 많이 읽어보지 못한 탓인지, 단순히 읽기만 하면서 내용을 체화하고 내 삶에서 그대로 적용하는 독서방식이 나는 싫다.
군에서 독서코칭을 통한 병영독서모임을 하면서 느낀 것은, 읽는 동안에는 크게 와닿지 못했던 내용들이 오히려 의견을 교환하고 감상을 나누면서 큰 감동이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 좋은 경험을 거치고 나니 자연스레 전역 이후에도 독서 모임에 참여해보고 싶어졌다. 그래서 찾아본 독서모임들이 참 많았다. 대학 연합 동아리부터 시작해서 여러 유료 독서모임까지. 생각보다 대한민국에는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참 많았고 나도 그런 이들과 함께 있다보면 내 취미가 된 독서를 더 사랑할 수 있을것 같았다.
수많은 독서 모임들 중 하나를 고르는 데에 내가 적용한 기준은 다음과 같았다.
1. 참가 인원의 연령폭이 병영독서모임(대개 20~25살)에 비해 비교적 넓을 것
2. 독서 모임을 빙자해 이성을 찾는 모임이 아닐 것
3. 서로에게 자극을 줄 수 있는 구성원들이 모여있을 것
4. 취향기반의 구성원 매칭이 되면 더 좋음
당장에 내가 가입할 수 있는 대부분의 독서 모임들이 위의 조건에 부합하지 못했다.
독서 모임의 대부분은 책을 너무 좋아해 오로지 책의 내용에 집중하는 모임이거나, 또는 책을 껍데기로 내세워 서로를 탐색하는 교제의 장이었다.
결국 고민하다가 가입하게 된 모임은 유료독서모임 중 하나인 책공이었다.
트레바리를 위시하여 잘나가는 수많은 독서모임 중에 굳이 책공을 선택한 이유를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1. 책장을 공유한다는 컨셉 - 원하는 책을 빌려 읽을 수 있다.
책공이 다른 독서모임과 가장 근본적으로 차이나는 점은 서로의 책장을 공유한다는 것이다.
모임이 시작하면 해당 모임의 구성원들은 현재 가지고 있는 책의 목록과 해당 도서를 빌려줄 수 있는지 적어서 제출한다.
이를 취합해서 하나의 공동책장을 만들고, 매번 모임마다 타인의 책장에서 최대 두권까지의 도서를 빌려갈 수 있다.
책공은 그린, 퍼플, 레드 등 모임의 성격에 따른 카테고리가 있다.
그 중 내가 가입한 책공 그린은 모임의 주제를 보고 참여하는 식이다.
예를 들자면 Growth or Die의 주제는 '나와 서비스의 성장에 대한 고민'으로, 해당 주제의 모임에 참가하는 사람들은 대개 (본인이 운영하거나 일하는)스타트업의 성장에 대해 고민하는 이들이었다. 당연히 이들의 책장은 스타트업 서비스와 관련된 책들이 많을 것이고, 따라서 본인이 해당 분야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관련 분야의 도서를 빌릴 가능성이 높아진다.
이처럼 원하는 책을 타인에게서 빌리면서 빌려준 이와 책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고, 추천사도 주고 받는다. 그러면서 내가 가진 책에 대해 한번 더 고민하고, 내가 읽으려는 책을 읽은 누군가와 감동을 공유할 수 있다.
2. 금전적 이유 - 책 구입비의 부담.
한 시즌에 10~20만원에 달하는 모임비를 내면서 고작 책 구입비를 부담스럽게 느낀다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독서모임의 대부분은 정해진 발제도서를 반드시 읽어오고 독후감을 적어오거나 해당 도서에 관한 의견을 교환하는 형식이다.
따라서 모임의 성격에 따라 클럽장(또는 구성원들)이 정한 도서를 강제적으로 읽을 수 밖에 없다. 읽지 않으면 몇 만원에 달하는 한번의 모임동안 얻어가는것이 거의 없을 확률이 높다. 그러지 않기 위해 매번 정해진 책을 사는 비용은 또 달마다 몇만원씩. 갓 전역한 내가 그 돈이 부담이 안될 수가 없다. 또, 하고있는 다른 활동이 있기 때문에 정해진 도서를 읽어오는 것도 부담이었다.
그러나 위에도 말했듯 책공에서는 책장을 공유할 수 있기 때문에, 추가적인 비용을 들이지 않고도 원하는 좋은 책을 마음껏 읽을 수 있다. 매번 책을 살 필요가 없는것이다.
물론 발제도서는 따로 있지만, 그 발제도서는 정말 '화두를 던지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모임리더가 구성원들에게 일방적으로 가르치려는 책이 아니라, 이런 문제가 있으니 구성원들의 생각은 어떤지 질문하기 위한 바탕인 것이다. 따라서 해당 책을 반드시 사거나 읽어야 할 필요가 없다. 그 시간에 내가 원하는 타인의 책들을 기분좋게 읽으면 된다.
3. 밀레니얼(82~02년생)들의 모임이라는 점
책공을 운영하는 memori의 모토가 전세계 밀레니얼을 연결하는 커뮤니티이기 때문에, 책공 참여 연령은 대부분 밀레니얼로 맞추어져 있다.
사실 독서 모임의 연령대도 고려하고있던 점이었는데, 책공은 나와 비슷한 연령대부터 현업자로 일하고계신 주니어,시니어분들까지 모두 참여할 수 있을 연령폭으로 정해져있어 좋았다.
적당한 나이폭을 정해놓았기 때문에 오히려 더 수평적인 분위기가 될 수 있었고, 나이가 달라도 서로 'OO님'이라고 존대하는 문화와 경청하는 분위기 덕에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
또, 이성을 만나는 데에 목적이 있는 이들의 행위를 제지한다는 규정도 명시되어있고 내 경험상 모임 내에서 그런 일이 일어날 것 같은 분위기도 전혀 아니었다.
이런 좋은 장점들이 있었기 때문에 책공에 가입하게 되었고, 1월 10일에 강남역 패스트파이브3호점에서 오후 7시 30분부터 11시까지 첫 모임이 진행되었다.
모임원들은 본인의 책장에서 책을 빌려가려는 사람이 있다면, 그 책에 대한 추천장을 적어 다음 모임 때 책과 함께 전달하게 된다.
뒤이어 모임이 시작되고, 서로 자기소개를 하면서 본인의 책장과 취향을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다.
책장을 공유한다는 게 처음에는 조금 부끄럽고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나에게 책은 단순히 지식 습득의 수단이 아니라 내 취향, 관심사를 100% 반영한 프라이빗한 물건이었기 때문이다.
내 책장에는 내 진로와 관련된 책도 있고, 내가 어릴적부터 정말 좋아하는 소설도 있고, 정말 100% 흥미위주로 산 책도 있었다. 이걸 공유한다는게 처음에는 부끄럽기도 했지만, 나를 잘 보여주는 수단이라고 생각해서 많이 적어넣었다(타인에게 보여주기 싫은 책은 굳이 안적어내도 된다)
재미있는 점은 이 책장을 기반으로 서로의 직업, 하는 일, 성향을 추측하면 대부분 맞는다는 것이었다.
영문본 책을 많이 가지고 계신 분은 한때 영어교사셨고, 스타트업과 관련된 책을 가지고 있는 분은 대개 창업가였으며, 중국과 관련된 책을 가지고 계신분은 지금 직장에서 대중국사업을 맡고 계신 분이었다.
어떻게 보면 굉장히 당연한 이야기처럼 들릴수도 있었지만, 나에겐 자기 삶의 궤적이 그대로 책장에 남는 것처럼 느껴져서 굉장히 신기했다.
그 때문에 서로의 사적인 이야기를 거의 할 시간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책장 소개만으로 다른 구성원들에 대해 많이 파악한 것처럼 느껴져 모임이 한층 더 원활했다.
책공 모임의 특징 중 하나는 퍼실리테이터라는 게 있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독서모임은 클럽장이 있고, 그들이 모임의 내용과 방향을 대부분 결정하게 된다.
그러나 퍼실리테이터는 일반적인 모임 리더의 개념이 아니라 단순히 모임을 원활하게 도와주기 위해 지정된 사회자같은 개념이다.
따라서 인원들의 발언시간 배분이나 부적절한 행동에 대한 제재만 할 뿐, 누군가를 가르치거나 이끌어가려는 분이 아니었다.
Growth or die의 퍼실리테이터는 현재 아자르에서 PM으로 일하고 계신 허승님이었는데, 모임 내내 구성원들에게 의견을 물으면서 '좋은 얘기 해주셔서 감사합니다'라며 배워가려고 하시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내 기준에서는 정말 한번이라도 만나보고 싶을 수준의 현직자신데도 매번 겸손하게 말씀하시는 모습을 보고 모임에 대해 더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첫 모임의 발제도서는 인스파이어드였는데, 퍼실리테이터 허승님 말씀에 따르면 PM들에게는 바이블과도 같은 책이라고 하셨다. 허승님께서도 정말 좋아하시고 중요하게 생각하는 책이라고 하셨다. 나도 이름만 들어봤을 뿐 실제로 읽어본 적은 없었는데, 발제도서에 관련해서 이야기를 하다 보니 한번쯤 꼭 읽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내가 개인적으로 PM직무에도 관심이 있어서 그런지 모르겠다.
발제도서에서 던져진 주제들은 다음과 같았다.
- 로드맵을 만드는 것의 필요성
- 마티 케이건이 제안한 4가지 리스크, 그리고 그 리스크에 관련된 시행착오 경험
- 프로덕트 에반젤리즘에 관한 원칙
- 제품 개발문화에 대한 경험공유
이외에도 몇개의 주제들이 더 있었지만 개인적으로 의견이 활발하게 나누어졌다고 느낀 주제들은 이랬다.
사실 나는 아직 현업에서 일하지도 않고, 아직 대학생으로서 너무나도 사회경험이 부족해 다른 분들의 의견을 열심히 경청하고 배우는 데에 주력했던 것 같다.
단순히 책의 내용을 나누고 감동하는데에 그치지 않고, 본인이 하고있는 서비스,직장에서 관련 경험들을 공유하는데에서 좋은 이야기들이 정말 많이 나왔다. 특히, 로드맵의 필요성에 대해 나눈 이야기들이 인상깊었다.
대형 건설회사에서 일하셨던 경험이 있으신 한 구성원분은 이전의 경험에 비추어 로드맵의 유효성과 리스크매니징의 중요성을 말씀하셨다. 로드맵이 아예 없어도 된다는 말은 오히려 로드맵을 잘못 만든 것일수도 있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책에서 말하는 내용에 반박하는 말씀이셨다. 또 다른 분은 IT회사나 특정 분야에 있어서 로드맵의 느낌은 조금 다를 수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여러 이야기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면서 서로에게 식견을 넓힐 수 있는 기회가 된 것 같다.
개인적으로 이야기를 들으면서 내가 들었던 생각은 이렇다.
요새 대부분의 스타트업이 추구하는 방향인 '애자일(Agile)'은 그 이전의 '폭포수(Water-fall)' 방식의 의사결정에 한계를 느낀 이들이 주장한 것이다. 폭포수방식은 상위 의사결정이 모든것을 결정해야하고, 시니어일수록 반드시 더 많은 지식과 책임을 가진 구조에서 유용했다. 따라서 수천억, 수 조원대의 굉장히 큰 사업규모를 가진 건설업에서 가장 지배적으로 사용되던 방식이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그보다는 작고 재빠르고, 순식간에 방향을 틀 수있는 IT스타트업들의 약진으로 애자일이 대부분의 추구방향이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모임 구성원들중 IT업종에서 일하시는 분들의 의견은 로드맵의 필요성에 대해 회의적인 감이 있었다. 또, 건설회사에 다니셨던 구성원분은 본인의 경험에서 폭포수결정방식의 로드맵이 너무나도 유효했기에 그렇게 말씀하신것이리라. 누구나 다 본인의 경험에서 가치관이 나오는 거라고 느껴졌다.
그 외에도 우리는 지금 일하고 있는 직장 뿐 아니라 다양한 기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떤 기업문화가 좋은 것인지, 어떻게 하면 더 좋은 가치를 전달할 수 있을지.
이 모임을 준비하면서, 그리고 모임을 하면서 나는 막연하게만 생각했던 스타트업에 관한 여러 용어와 개념들에 대해서 조금이나마 공부하게 되었다. 린스타트업, 그로스해킹, 애자일등의 여러 용어는 나에게 던져진 막연한 숙제같았는데, 막상 이런 모임과 함께 공부하다보니 너무 재미있고 관심이 가는 이야기들이었다. 개인적인 자기계발의 기회도 된 것이다.
사실 3시간반에 달하는 시간동안 모임에서 나누었던 대부분의 이야기를 다 적어놓았지만, 개인적인 이야기도 많고 내가 아직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의 이야기도 많아 다 옮기지는 못할 것 같다.
16명의 모임중 개인적인 사정으로 불참한 분들이 몇분 계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PM뿐 아니라 정말 다양한 직업과 배경을 가지신 분들이 와서 모임을 풍성하게 만들어주셨다고 느꼈다.
특히, 최근 CRM팀에서 일하면서 고객에 대한 내 서비스의 가치를 진심으로 고민해보게 된다고 말씀하신 한 모임원분이 계셨다. 그걸 들으면서 단순히 직장인들은 돈을 버는 수단만으로 직장을 생각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 내 편견이 한없이 부끄러워졌다. 구성원이 단 몇명이든 수백 수천명이든, 세상에 나와 누군가에게 서비스하고있는 기업들에는 가치와 의미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리고 그 분들의 노력이 있어서 내가 수많은 서비스와 어플리케이션을 좋은 경험으로 사용하면서 살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모임이 끝나고, 우리는 서로 빌려주기로 했던 책을 나누고 헤어졌다. 모임과 모임 사이에는 자발적인 번개모임이 있다고 하는데, 아직 정확한 날짜는 잡히지 않았다.
나는 젊음의 탄생이라는 책을 빌려왔는데, 아직 읽어보지는 못했다.
빌려온 책이라 공짜인 느낌이 들어 즐겁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빌려온 책인만큼 정말 소중하게 읽고 돌려드려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책공 모임을 하면서 처음으로 내가 대학생인것이 아쉬웠다.
아직 공부의 깊이가 깊지도 않고, 사회 경험이 많지도 않아 다른 구성원들과 충분한 깊이로 이야기를 나눌수 없는 점이 속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이야기에 경청해주시고 내 의견을 물어주시는 퍼실리테이터님과 구성원들에게 감동하기도 했다.
더 많이 배워가고, 더 많이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마도 다음번에는 이정도로 길게 포스팅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모임을 하면서 느낀점이 많아 이렇게 적어본다.
2020년의 시작은 참 좋은 것 같다.
정말 좋은 사람들을 만나 다친 곳 하나 없이 몸 성하게 잘 전역했고, 너무나도 열정있는 사람들과 피로그래밍활동을 하며 자극받고 있으며, 책공을 통해 다양한 식견을 가진 현직자분들을 만나 내 시야를 넓힐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요새 그런말을 한다. 내가 이번 1년동안 배우고 느낄 것들이 지금까지 23년간 살아오면서 얻은것보다 많을 수도 있을것같은 느낌이 든다고. 시작을 참 잘해서 즐겁고, 고맙다. 나한테 주어진 기회를 놓치지 말고 열심히 나를 채워가야겠다.
'Alpaca > 책공 5기 그린 Growth or Die(20.01.10~05.15)'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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